정영숙 수필가

"갇혔대"
퇴근 후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 같은 게 들렸지만 남편의 휴대전화 소리라 생각하고 무심했다.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주방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물 묻은 손을 대충 닦으며 현관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에 아래층 사람이 갇혔다고 했다. 조금전의 소리는 남편의 휴대전화 소리가 아니라 엘리베이터 비상벨 소리였다. 남편과 나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음이 급하니 겨우 4층짜리 건물 계단이 왜 이렇게 많은가 싶었다. 1층에 고정된 엘리베이터 안에는 3층에 사는 청년이 갇혀 있었다. 관리업체에 연락했으니 금세 사람이 올 거라고 일단 안심시켰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실감 났다. 남편이 수리할 사람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았다. 십 분쯤 후면 도착한다고 했다.

평소 십 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시간의 길이는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긴장하고 있을 청년이 걱정스러웠다. 남편은 도로에서 관리업체 기사의 차를 기다리고 나는 갇힌 청년에게 불안함을 덜어 주려고 계속 말을 붙였다. 코로나 19라는 불청객이 기승을 부려 격리되거나 갇혀 지내는 일의 두려움을 실감한 터라 갇힌다는 말만 들어도 갑갑증이 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매월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 있다. 편한 장소에서 만나는 모임이라 굳이 집에서 모일 이유가 없었지만 한 친구가 1월 모임을 자기 집에서 하자고 했다. 그녀는 큰언니처럼 구성원들을 챙겨주는 사람이었기에 초대받은 우리는 즐거웠다. 모임이 있던 날, 직접 구운 스테이크와 손수 내린 커피를 내놓았다. 벽난로가 있는 다락방에서 기타 리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겨울밤의 호사를 마음껏 누렸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녀가 상해를 다녀왔다는 것을 몰랐다. 설령 알았다 해도 그게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우한 폐렴이라는 말이 가끔 뉴스에 등장하는 정도라 그다지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모임의 구성원 몇몇은 부산으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상해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했지만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오페라 공연을 보았다는 게 좀 걸리기는 했지만 별문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월 초가 되면서 나는 약간의 인후통과 감기 증세가 보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있던 해열진통제를 먹으니 인후통은 사라졌지만 목 안의 이물감은 지속되었고 잔기침도 나왔다. 불안지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다. 평소에도 겨울만 되면 잔기침을 하거나 감기를 자주 앓는 편이라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아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신경을 쓴 탓인지 머리도 아프고 몸도 무거웠다.

결국,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에 설치된 선별진료소를 찾았다. 그간의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우한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또 그때 상해에 폐렴이 유행한 시기도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불안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잠복기를 계산해 보아도 이미 시일이 지났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도무지 불편한 마음은 덜어지지 않았다. 행여 민폐를 끼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무증상 감염, 잠복기 감염이라는 말들이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그때부터 나 자신을 스스로 격리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대중교통을 피해 자가용만 이용했으며 회사 내에서는 구내 버스를 타지 않고 무조건 걸어 다녔다. 직장동료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잡담을 삼갔다.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혼자 밥을 먹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뒷걸음을 치면서 거리를 계산했다. 집에 와서도 남편과 거리를 두었고 밥을 따로 먹기도 했다. 피부가 벗겨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손을 씻고도 부족해 손 소독제까지 들고 살았다. 스스로 격리에 들어가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그녀를 만난 후 달포가 넘도록 회사와 집만 오가는 격리 생활을 한 뒤에야 내 마음은 조금씩 여유를 찾을 수 있게 있었다. 스스로 갇혀 지낸, 그것도 일상에서 완전히 갇힌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갇혀 지낸 시간이었다. 누가 가두지 않아도 갇힌다는 것은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걱정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확진자와 접촉이 있었거나 확진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 달이 훌쩍 넘는 시간은 내게 참으로 길고도 힘든 나날이었다. 자유롭게 평범한 일상을 누릴 때는 깨닫지 못했던 갇힌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요즘이다.

잠시 후 도착한 수리기사는 엘리베이터 틈새를 보더니 뭔가 낀 것 같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을 슬쩍 건드려 보고는 이 층으로 올라가나 싶었는데 금세 엘리베이터가 작동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갇혔던 청년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많이 놀라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괜찮다며 자신이 거주하는 3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갇힌다는 그 중압감을 짐작할 수 있기에 웃으며 올라간 그 청년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청년이 아무 일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듯이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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