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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읽는 세상] 선죽교에 의죽(義竹)을 세운 단심가

기사승인 2020.02.13  19: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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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오천읍 문충동 소재 원 유허지의 새로 만든 비석과 비각.
   
▲ 오천서원으로 이전된 유허비각.
   
▲ 오천서원으로 이전된 원 유허지 비석.
포은 정몽주(1337-1392)는 오천 영일 정씨 시조로 고려 의종 대에 추밀원주지사로 인종의 유지를 받들어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 간신들의 비방을 받고 자결한 정습명의 11대 손이다. 그는 의창을 세워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교육진흥에 힘썼고 명나라의 대명률을 참고하여 '신률(新律)'을 간행하여 고려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고려 대학자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이숭인, 정도전 등과 함께 수학하여 1360년 장원급제하고 예문관의 수찬, 검열관으로 관직에 첫발을 내딛었고, 1364년에는 이성계가 여진족, 왜구를 토벌할 때 그의 종사관으로 여러 번 종군하였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명나라와 교친을 하고 오래 고려를 간섭하고 쇠약해지고 있는 원을 배척하는 배원친명을 주장하여 친원파 이인임 등에 의해 유배되기도 하였다. 명나라와 일본을 왕래하여 많은 외교문제를 해결하였고 생애를 마치기 전까지 고려 왕조의 명맥을 붙들고 지키기 위해서 헌신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과 뜻을 같이하며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고 고려의 부흥을 함께 도모하였으나 정도전의 전 국가의 토지를 공전화(公田化)하는 급진적인 토지법 전면시행을 반대하고 일부 권문세가만의 토지몰수를 주장하면서 정몽주의 체제수호론과 이성계의 역성 혁명론이 갈라지게 되었다.

고려사회 체제 내에서 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정몽주의 입장과 고려사회 체제로는 근본적 모순과 제약으로 개혁의 실현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성계 일파의 입장은 양립할 수 없는 상반된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대립된 가치의식과 시대인식은 '혁명론'과 '강상론'이라는 이념적 대립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강상론'의 입장을 대표한 정몽주는 혁명세력이 이미 대세를 장악하였던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끝내 고수하다가 마침내 혁명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삼봉 정도전에게 맹자의 역성혁명의 내용을 가르쳐 준 것도 이색의 같은 문하생인 정몽주였으나 농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파악하고 있었던 정도전은 과격한 토지공개념인 전국의 자경농에게 토지를 균등 분배하는 토지제도를 고수하였고, 조준은 현역관리에게만 주는 과전법을 주장하였다. 바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과전법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몽주는 기득권의 반발을 막지 못하리라 생각하여 권문세가들의 토지 몰수만을 주장하였다.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의 대결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끝이 났고, 포은은 고려왕조에 일편단심을 지켰으나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지시로 죽임을 당했다. 새로운 관료체계와 새나라를 세우려던 정도전은 조선개국 후 죽임을 당하고 500년 동안 버려졌다 고종 2년에 대원군에 의해 훈작되었다. 조선은 고려사회보다 더 신분이 공고한 보수적인 나라가 되었고, 정몽주의 성리학을 숭상하는 나라를 세우고 절대왕권의 나라가 되어 태종 이방원은 재위 13년에 그에게 문충의 시호를 내리고 조선 500년 동안 그를 숭상하였다. 조선왕조에 충성하는 이념의 중심으로 포은 정몽주를 세운 것이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말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수입한 주자학을 성리학의 학문적 틀로 제시하였고 원의 지배로 어지럽혀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향교와 성균관을 세우고 주자집주를 공부하여 선생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는 극찬 받으며 한국 성리학의 원조로 추앙받았다. 그는 고려왕조 500년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포은 정몽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역사가 흐르면서 다를 수 있겠지만, 포은이 고려 말의 어지러운 사회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과 절의를 읊으며 마지막 남긴 그의 신념을 축약한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는 세상사와 역사의 지표로 작용하여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새로운 해석을 하며 역사 속에 영원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오늘도 우리들 가슴속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뿌리고 가신 붉은 선혈 위에 자란 선죽교의 의죽(義竹)이 푸르게 자라고 있으나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이가 몇이나 있으며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의 백성과 나라 사랑은 어떠한가 되돌아보게 한다.

포은 정몽주가 자란 포항 영일에 있는 유허지에 유허비와 오천서원이 있다. 그가 살던 유허지 앞에는 버드나무 고목이 현시대의 유학의 이념처럼 옆으로 스러진 채 누워있었다. 유허지의 담장 너머에는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지는 곧고 푸른 대나무 같은 해병대 군인들의 기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글/이을숙 시조시인

대경일보 webmaster@dkilbo.com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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