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시사평론가

시간이 흘러 올 해도 달력이 한 장 남았다. 무심코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고 썼다가 이내 고쳤다. 흘러 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버릇은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아니면 인간 유전자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 새싹들이 낙엽으로 변해 장난감 기병처럼 나뒹굴고 새 해 아침 붉은 각오들은 세모의 평가와 결산을 기다리는 중이다. 눈에 들어오고 마음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덧없는 시간을 알려주며 다만 명멸해 갈 뿐이다.

경제 성장률 목표, 체중 감량과 근육 만들기, 이력서에 한 줄 더 추가하겠다는 젊은 목표들이 바스락거리며 흩날려 간다. 가장 많이 연주되는 피아노 협주곡 열 개를 들어 식별하겠다는 필자의 목표도 실현되지 못했다. 평범한 것이 최고라 큭큭 쓴 웃음으로 위안을 삼는다. 윤리, 전통, 가치관이 허물어지는 혼란 속에서 단 하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현재라는 시간을 살고 있다’는 자기인식이다.

시간은 누가 만든 것일까. 처음과 끝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한 달이라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궁리하다가 생각이 날뛰었다. ‘처음’이라는 시간에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럼 그 이전엔 뭐가 있었을까. 오랫동안 붙들어 온 이 물음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깨닫고는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처음’이란 개념에는 그 이전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끝’ 또한 마찬가지로 그 다음에 아무 것도 없음을 선포한다. 지혜자들은 그런 까닭에 삼라만상은 처음과 끝이 있다는 ‘유시유종’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한강의 기적같은 눈부신 고도 경제성장 신화도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은퇴와 함께 종언을 맞고 있다. 90년대 초 유학시절 일본에서 목격한 현실이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다. 성장이 멈추고 파이가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이른바 ‘제로섬’ 정체 사회다. 새로운 성장을 이끌어갈 엔진이 필요한데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한민국 연구개발 투자는 국내총생산(GDP)의 4.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하지만 연구결과를 사업화하는 벤처투자 비율은 0.19%로 미국 0.67% 등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다.

포항에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철강회사, MIT를 지향하는 공과대학, 산업과학연구원을 비롯하여 방사광가속기, 생명공학연구센터, 나노융합기술원 등 우수한 연구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효율적인 산학연 협력 체제를 기반으로 지난 30여 년간 방대한 연구결과가 축적되어 있다. 이를 사업화 하여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기만 하면 지역경제는 물론 대한민국의 차원 높은 경제성장을 선도해 나갈 수 있다. 때마침 포항 벤처밸리도 진행되고 있어 실리콘밸리 같은 벤처 생태계 조성의 호기도 맞고 있다. 문제는 여러 경제 주체들이 함께 위기를 극복할 의지와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인식은 민족적 동질감 회복에도 필수 요소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턴가 비이성적인 이질감이 괴질처럼 퍼져 있다.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에 대한 시간 개념, 일제 식민지 역사 인식, 광주 항쟁과 세월호, 포항 지진 등 여러 이슈에 대한 관점이 달라도 너무 다르게 뿌리내려 있다. 마음을 모아 함께 미래를 준비해도 버거울 판에 과거를 되짚는 기억들이 서로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살림살이에 별 도움이 못되는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또 우리는 얼마나 적과 동지로 갈라서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 돌릴 것인가.

‘연태단상’ 으로 고뇌한 시간이나 글이 멈춘 시간들 모두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괘종시계의 육중한 추가 다시 흔들리듯 ‘여산필담(如山筆談)’으로 소통할 세렌디피티를 얻었다. 서슬 푸른 논점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다짐을 하면서도 때로 푸성귀 우수마발이 배달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럴 때마다 독자 제현의 아낌 없는 질타가 오류를 바로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필자에게는 있다.

유한한 삶 속에서 무엇보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이 정해 놓은 달력을 찢어 넘기며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필자 약력>

1964년생. 포항 출신.
동지상고. 외국어대 일본어과.
연세대 행정학석사
일본 와세다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포항제철 입사. 도쿄주재원. 홍보실. 기획조정실.
국가브랜드위원회. 포항테크노파크. 포항정책연구소장.
환동해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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