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성제 수필가

해 질 무렵, 길을 잃었다. 버스로 몇 정거장을 지나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도를 보니 숙소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로마 시내를 들락거렸으니 그새 이력이 붙어 자신 있게 버스를 탔는데, 도로를 건너서 타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이 75번 노선에 숙소가 속해있는 동네가 있으니 계속 가다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 다섯 손가락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는 버스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종점이었다. 그대로 있으면 시내로 다시 돌아갈까, 숙소 동네를 지나가기는 할까, 차비는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머리는 어설프게 구르는데 발걸음은 당당하게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거기에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비단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닌 물건이나 동물과도 인연이 있는 줄은 아는데, 어떤 장소도 그리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불교에서는 억겁 년 전에 스쳤던 옷깃 하나가 줄이 되어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만남의 우연이란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낯선 로마의 75번 종점에 이르렀을까 싶었다. 도로를 건너서 버스를 타는 바람이긴 했지만 그보다 삭막한 내 마음을 적셔줄 뭔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첫눈에 반해버린 한 사람을 본 것 같이 멀구슬나무 숲을 만나게 되었는지도.

온통 초록으로 하늘을 가린 멀구슬나무 숲에서 열매들이 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억수비 쏟아지는 소리였다. 소낙비도 장대비도 아닌 멀구슬비. 납작 돌멩이로 포장된 도로 위에 둥근 초록 빗방울들이 하염없이 튀었다. 바짓가랑이가 온통 초록으로 물들 것 같았다. 포도에 튕기고 튕겨 오르는 멀구슬비가 흥건해져서 마침내 75번 종점인 언덕에서 언덕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랫동네와 연결된 높은 계단 아래에서는 남실남실 갈색 머리통들이 언덕 위로 떠오르는 게 보였다. 멀구슬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타고 내려오는 석양이 포도를 더욱 번들거리게 했다. 마치 풍경과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먼 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드디어 만난 인연 같았다. 버스를 잘못 탄 당위성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멀구슬나무, 실은 내게 특별한 첫인상을 준 나무다. 수년 전, 매서운 강추위가 지난 어느 겨울날 들꽃정원에 들렀다가 그 이름과 눈이 마주쳤다. 구슬은 구슬인데 힘이 센 쇠구슬이나 투명 유리구슬이 아닌 '멀구슬'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멀'이란 말의 어감이 국물로 치면 진하지 않은 묽은 국물 같고 눈동자로 치면 약간 생기를 잃은 듯한 눈빛이랄까. 그런데 이런 다부지지 못하고 희멀건 느낌 보다 내게는 맑고 순박한 구슬로 다가왔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르르르 까불리면 아무도 모르게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구슬, 멀구슬이었다.

봄이 와도 쉬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팽나무나 대추나무처럼 멀구슬나무도 늦잠꾸러기였다.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는 그의 보랏빛 꽃이 보고 싶었으나 꽃이 핀 동안 나도 전선에서 향기를 뿜느라 얼마나 허둥거렸는지 아직 한 번도 멀구슬의 꽃향기를 만난 적이 없다. 작은 타원형의 열매는 탈취제로, 뿌리는 구충제로 쓰인다니 벌레를 죽이는 독한 나무가 아닐까 생각했다. 혀로만 그 예쁜 이름 멀구슬을 굴려보며 내 안에서 억겁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만날 풍경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일까. 길을 잃어 만난 풍경이기에 더욱 애틋한지도 몰랐다. 여행에 눈을 트고 길을 텄으니 다음에 다시 로마에 온다면 조금 쉽게 75번 종점에 올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 진풍경을 다시 만난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멀구슬비가 퍼붓는 저녁, 나는 잃어버린 길을 찾아 헤매면서도 온 마음이 그 풍경에 팔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 치 알 수 없는 앞으로의 시간은 고사하고 지금, 조금만 더, 머물고 싶었다. 가슴으로 하염없이 풍경을 그러안으면서 그러나 발걸음은 더듬더듬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야 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선생님이 그리운 아사코를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쩌면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될 것 같은 이 벅찬 풍경과의 인연을 생각하다 울컥했다.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언덕길 내려가는 버스에서 창을 두드리는 멀구슬 빗소리에 그만 눈시울이 젖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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