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일 수필가

사무실에서 농촌일손돕기를 하여 나도 참가하였다. 멀리 떨어진 한 과수원에 가서 적과(열매솎기)를 도와주기로 했다. 버스를 대절하여 현지 사과밭에 가서 열매를 솎아주고 왔다. 해마다 일손돕기를 하였지만 적과는 처음이다.

적과는 하나의 가지에 달린 여러 개의 열매중 하나만 남기고 모두 잘라내는 것이다. 비료를 주거나 농약을 치는 것과는 달리 기계로 할 수 없다. 사람이 일일이 가위로 잘라내야 한다. 일손이 많이 들 수 밖에 없다. 대신 큰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농촌일손돕기로 적당한 것 같다.

적과를 하는 이유는 과일이 크고 알차게 자라도록 하여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때 잘려나가지 않고 남은 열매는 수확할 때까지 그대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흉풍년이라는 변수만 없으면 그해의 소출을 결정하는 기초가 된다. 농작물 재해보험에서는 적과후 착과수 조사결과를 피해액 산출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가지마다 많은 열매가 달려있다. 그대로 두면 열매로 공급되는 영양이 분산되어 모든 열매의 상품성이 떨어진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런데 열매를 잘라내면서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잘라내는지 결정이 쉽지 않았다. 열매들이 모두 고만고만해서 잘려나간 열매와 남은 열매를 비교해도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열매가 많았다.

작년에 했던 전지(가지치기)는 잘려나간 가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적과는 나름대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열린 열매를 자르는 것이라 쉽지 않다. 이 열매들은 이른 봄의 추운 날씨를 이겨내고 꽃눈이 분화하여 수분과 수정이라는 생식생장의 과정을 거쳐 맺혀진 것이다. 잘려나가지 않고 그대로 자라기만 하면 좋은 상품으로 자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을 열매를 고르는 것은 전적으로 작업자의 권한이다. 아무도 왜 이열매를 놔두고 저열매를 잘라내는냐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업자는 열매를 고르는데 별로 고민도 하지 않는다. 특별한 기준이 없다. 그냥 아무거나 하나를 고른다. 가장 좋은 열매를 고르지 않더라도 어차피 가지의 영양이 집중하여 공급되면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열매만 아니면 큰 문제가 없다.

나도 처음에는 가지마다 달려있는 열매를 모두 비교하여 가장 가장 튼실한 것을 고르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다가는 시간내 작업을 완료할 수 없을 듯하여 터무니 없는 자잘한 열매만 아니면 아무거나 고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남는 열매와 잘린 열매의 운명이 바뀐다. 이곳의 사과나무는 좋은 품종이기 때문에 수확된 과일은 최상품으로 백화점에 납품된다고 한다. 그러나 잘려나가면 그냥 밭의 거름이 된다. 아무런 합리성을 기대할 수 없는 선택자의 기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열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잔인한 상황인 것이다.

사실 우리도 이런 처지에 놓일 때가 있다. 자신에게 중요한 선택이 있는데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선택을 받는 자는 선택을 하는 자의 처분에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갑질이 나오게 된다.

보이지 않는 운명에 의해서 선택되기도 한다. 우리는 태어난 국가를 선택하지 못했다. 태어나니 모국이 된 것이지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세대를 선택하지 못했다. 태어난 연도에 따라 지금 은퇴세대가 되거나 기성세대 그리고 자녀세대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나 살고 있는 나라와 속한 세대에 따라 운명이 천차만별이다. 특히 세대에 있어 우리 세대와 부모세대 그리고 자녀세대는 환경이 다르다.

지금 우리나라는 심각한 인구감소가 문제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국가소멸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과거에는 자식을 무조건 낳아야 하는 가치관이었지만 지금은 가족계획에 의해 자녀를 낳을지 말지를 선택에 의해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자녀세대는 취업난에 결혼을 포기하는 삼초세대, 오포세대가 되고 있다. 자녀세대는 부모세대보다 못살게 되는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는 말도 있다.

중요한 결정을 하는 선택을 잘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나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좌우되는 측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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