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그녀의 도움닫기가 시작되었다. 전력질주 해왔으니 구름판을 박차고 뛰어오를 일이다. 숨고르기는 필요 없다. 오랜 시간 망설임이라는 숨고르기는 할 만큼 했다. 모래판의 끝을 향해 보폭만 조절할 뿐이다. 그래서 거침이 없다. 저만치 앞서가는 도반들의 뒤통수를 향해 뛸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갈 힘찬 도움닫기여야 하리.

개나리 진달래보다 한발 먼저 히어리가 피었다. 비단 바람에 꽃이 만개하고 강에는 물이 가득하다. 곧 하얀 날개를 지닌 새들이 돌아올 것이다. 작고 연한 노란 꽃들이 포도송이를 만들어 잎도 없이 나무 가득 달려 참으로 아름답다. 꽃 색이 은은하니 기품이 있다. 피어나는 모습이 노란색에 흰 꽃을 섞은 꽃구름이 머문 듯 느껴지는 오늘은 김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 날이다.

오래전 내 나무 한그루 정성스럽게 키워 마침내 이 봄날 꽃눈 터트리는 듯한 날이다. 아지랑이 같은 아련함이 참 고운 봄날. 봄꽃 보러 나오듯 축하자리에 지역의 문인들이 참석해 감탄일색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와 함께 했던 도반들이 자신의 시집 몇 권씩 안고 내달리고 있을 때도 자꾸만 망설이며 뒷걸음치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다잡듯 구름판에 세운 원로 시인이 바로 저 앞 테이블에 앉아있다.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어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라는 듯, 진심어린 격려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오늘 그녀는 책 냄새 향긋한 이 자리의 주인공인 셈이다. 제법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이며, 관객을 맞이하는 알근한 표정이며, 헤실바실 흘리는 웃음이 누가 봐도 단독 주연임을 말해주고 있다. 곧 그녀는 분신과도 같은 시집 한 권 들고 무대 위에 올라 자신만의 시 세계를 펼칠 것이다. 소리 내어 통곡하기보다는 슬픔을 안으로 삭이고, 분노를 드러내기 보다는 조용히 잠재우며, 고독을 천천히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스며들게 끌어안았을 그녀의 공연에 나는 들뜬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힘차게 도움닫기 해 나아갈 무한한 시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내 유년의 학교 운동장은 바다 같은 곳이었다.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병풍처럼 빼곡히 둘러쳐진 그 곳은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함성 물결로 출렁거렸다. 매일 그 함성의 물결은 예측 불가능한 높이의 파도가 되어 밀려오고 밀려가곤 했다. 마치 해가 뜨면 아이들을 빨아들여 삼키고 노을 속으로 다시 토해내던 블랙홀 같았던 곳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한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파릇파릇 자라 생동감과 끈기를 자랑하는 유월의 보리보다 더 빨리 자라 푸르렀다.

살구꽃과 함께 봄이 찾아오면, 아이들은 겨우내 부실해진 다리에 힘을 올리려 운동장 구석구석을 뜀박질해 다녔다. 허옇게 마른 버섯이 핀 얼굴에 주근깨를 다닥다닥 쏟아 부으며 먼지와 함께 뒹굴다 보면 계절은 쏜살같이 지나가곤 했다. 변변한 운동기구 하나 없이 그저 덩그렇기만 한 운동장 한 켠에 멀리뛰기 모래판 하나가 있었다. 체육시간이면, 직사각형의 긴 모래판에 부족해진 모래를 채우려 선생님과 우리들은 밀거니 당기거니 하면서 리어카로 모래를 실어다 퍼 넣었다. 그런 다음, 일렬로 줄을 서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차례로 모래판으로 뛰어 들었다.

그때마다 빼빼 다리에 키가 작은 나는 늘 꼴찌였다. 죽어라 뛰어도 엉덩방아까지 찧어대니 속이 상했다. 성큼성큼 걷듯 모래판을 향해 훌쩍 날아가는 키 큰 아이들이 부럽기만 했던 그때. 선생님은 도움닫기의 중요성을 일러주셨다. 너덜너덜 찢어진 마대자루 발판에 발바닥 전체로 강하게 밟고 높이 뛰라며 키 작은 우리들을 독려 했다. 앞으로 나아갈 삶의 여정에도 도움닫기가 필요할 때면 두려워말고 용기 내어 힘차게 딛고 뛰어 올라야 한다며 위로도 했다. 그랬다. 그 어떤 일에서 용기를 내는 순간이 바로 도움닫기의 시작이란 것을 삶의 긴 여정 곳곳에서 체험했던 터였다.

다시 봄이다. 잔뜩 긴장했던 것들이 녹는 계절이다. 말하지 못했던 사연들이 녹아 흐르고, 움츠렸던 뼈 마디마디가 풀려 서서히 몸을 푸는 시기다. 겨우내 얼어붙어 오도가도 못하던 것들의 금족령이 풀리니 서로 못보던 이들이 바라볼 때다. 이즈음. 한 해의 멋진 도약을 위해 발 구름판 위를 힘차게 뛰어 올라봄은 어떨까. 풀린다는 뜻 속에는 경직된 긴장감 같은 건 없다. 겨우내 얼음에 갇혀있던 걱정과 슬픔도 함께 녹는다는 뜻이다. 강물은 녹아 흐르며 불어오는 남풍을 맞이할 것이고, 꽃눈은 터져 돌아온 철새를 바라볼 것이다. 그러니 힘차게 도움닫기 해 뛰어 볼 일이다.

봄 편지 받듯, 그녀의 시집 한 권을 받아들고 설렌다. 꽃눈 틔우는 삼월의 한 그루 나무처럼 살짝 물기 도는 시일까. 조금 쌀쌀함과 조금 따뜻함을 오가는 이 계절의 무심함과 애틋한 살가움일까. 로렐라이 절벽의 요정처럼 매혹적인 노래를 들려줄 것도 같고, 문학의 갈증에 허덕이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맑고 시원한 물을 찾아 오아시스를 헤매는 고단함도 실렸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이 봄.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든 서 말의 꽃향기와 함께 그녀의 도움닫기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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