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현 화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에 화가들은 평민의 이야기와 평민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주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19세기 신고전주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작품이 많은 이야기와 평범한 일상의 경이로운 감동과 더불어 전시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프랑스 시민혁명이 새로운 자유를 가져왔고, ‘베이컨’의 경험론과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과학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이는 산업혁명과 카메라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이는 이야기나 초상화를 그려서 귀족들의 건물 일부를 장식하는 미술에서 개인의 삶과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미술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만들어진 오르세 철도역은 호텔을 겸하고 있었는데, 1970년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1986년에 19세기 미술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고대로부터 1848년까지의 작품은 ‘루브르’에서, 1848년부터 1914년(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는 ‘오르세’에서, 1914년 이후의 작품들은 ‘퐁피두센터’에서 전시하도록 정했다. ‘밀레’,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흐’ 등 미술서적에서만 보던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을 눈앞에서 가까이 대하여 보니 위대한 영혼들의 숨결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오르세 미술관 5층은 인상주의 작가들만의 작품들을 총망라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빛과 바람과 각자의 개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드골’대통령의 후임이었던 ‘조르주 퐁피두’가 빈민가의 중심에 세계적인 현대 미술센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조르주 퐁피두 센터’가 되었다. 1971년에 시공, 1977년에 개관한 ‘퐁피두센터’는 20세기 초(1914년 이후)의 작품부터 디자인, 사진, 미디어분야 등 다양한 현대미술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도서관, 북 카페, 아트상품코너, 소극장이 있어서 테마별 전시와 더불어 음악, 춤, 공연, 퍼포먼스, 영화상영을 겸하고 있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장한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5층부터 4층, 3층 세 개의 층을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순서로 전시가 되어 있고 현대미술의 변화, 발전과정이 잘 전개되어 있었다. 2층은 도서관, 1층에는 북 카페와 아트상품코너가 있었다. 다른 곳도 그렇지만, 퐁피두 전시관은 특히 현대미술의 교육장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초, 중,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방문수업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5층 전시의 처음 시작은 ‘폴 세잔’의 그림과 아프리카 원주민의 ‘탈’이었다.
‘세잔’은 “모든 물체는 원구와 원뿔, 원기둥으로 되어있다.”고 미술적 정의를 하고 단순 과학적 논리로 작품을 제작 했으며 색체가 강렬했다.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점령 하겠다.”던 세잔은 비록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와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액상 프로방스로 돌아가지만, ‘세잔’의 논리와 아프리카 탈의 단순 강렬한 표현방식은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현대 미술은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피카소’로부터 출발한다.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천재 ‘피카소’는 “나는 12살 때 ‘램브란트’만큼 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게 된 것은 60이 돼서야 가능했다”고 했고 실제 그의 12세에서 15세 사이의 작품을 보면 그의 스승이 놀랬듯이 램브란트 정도의 그림을 마스터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는 과거의 미술을 ‘세잔’의 방식으로 분해하고 아프리카의 단순 강렬한 표현방식으로 변신했다. 이후 모든 방식을 수용했고 이는 여러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퐁피두에서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인간의 의식세계를 표현했다. ‘샤갈’은 꿈과 기억을 자유롭게 표현했고,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본 것을 그린다.”고 했던 ‘뭉크’는 기억 속에서 일그러지고 변형된 모습들을 그렸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눕혀놓고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림놀이’처럼 페인트를 뿌려 자유스럽게 표현된 이미지를 작품화 했으며 ‘칸단스키’는 음악적인 미술을, ‘들로네’와 ‘몬드리안’은 형태와 색의 존재원리를 표현했다. 수많은 현대 화가들은 그야말로 ‘아티스트(Artist)’였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벌어지고 일상은 파괴 되었으며 유럽전체가 피난처도 없이 대대적인 전쟁터가 되었다. 수많은 파괴와 살상 속에서 세계는 인간 감성의 끝까지 파헤쳐지고 잔인함의 끝은 어딘지도 모르게 추락했다. 미술은 무엇이고, 무엇을 그려야 하고,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다.

‘마르크스’, ‘프로이드’, ‘니체’, ‘사르트르’ 등과 특히 과학에서 ‘에디슨’과 ‘아인슈타인’의 등장은 신들과 왕들이 만든 전설의 시대를 끝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대’도 정리하면서 새로운 첨단 과학시대와 신자본주의시대를 열었다. 진정한 휴머니티의 해방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작품들로 이어지다가 화면에 물체를 붙이기도 하고 물감을 뿌리고 그 위로 온 몸으로 뒹굴기도 하고 급기야 화면에 아무것도 없는 하얀 캔버스가 그대로 전시장에 등장했다.

‘빈 캔버스’가 전시된 다음 전시장에는 이미지나 형상들이 화면 밖으로 나와서 벽에 설치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와 결합되어 퍼포먼스 같은 행위예술로 변화하고 큰 땅에 작품을 하는 대지예술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퐁피두센터의 전시관을 5층부터 3층까지 보고나면 머리가 어지럽다. 일단 충격파(?)를 맞는다.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현대미술 흐름의 중심이, 안전한 미국 뉴욕으로 이동한 점에 대항해서, 현대미술의 종주국임을 회복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이 발휘되어 만들어진 ‘퐁피두’는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그 작품들은 위대했던 영혼들의 흔적일 뿐이다. 그것들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되살아나서 다르게 표현될 것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모네의 대작 ‘수련’시리즈를 중심으로 인상주의 작품에서 설치미술까지 전시되어 있었고 ‘로뎅 미술관’은 ‘로뎅’이 살며 작업하던 집과 정원 전체가 파리시에 기증되어 꾸며져 있었다. ‘로뎅’의 수많은 청동작품과 돌조각들, 특히 ‘지옥문’과 그 가운데서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은 감동에 감동을 더했다.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도 함께 있었는데 살아서 ‘로뎅’과 함께하지 못했지만 죽어서 함께 전시된 그녀의 작품은 열정적이면서도 작품에 나타난 표정은 100년이 지나서 방문한 관람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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