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시오리 신작로에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소복 쌓아 폭신한 길을 만들었다. 겨울방학을 하는 날 받은 하얀 선물이었다. 눈길은 자랑스러움과 설렘으로 통통 튀듯 집으로 내달리는 아이의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여 주었다. 행여 책보자기 속 우등상장이 젖을새라 연신 꼭 끌어당겨 안으며 달렸다. 저만치 싸릿문 앞에서 서성이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무명 머리 수건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분명 엄마는 오랫동안 저렇게 아이를 기다리게 틀림없었다.

“오빠들 볼라. 어서 먹거라.” 꽁꽁 언 아이의 손을 이끌고 간 뒤안에서 엄마가 내민 것은 살얼음 진 팥죽 한 그릇이었다. 동지가 지난 지 언젠데. 아직도 팥죽이 남아 있다니. 엄마는 누구를 주려고 장독대 깊숙한 저 항아리 속에 넣어뒀던 것일까.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오돌오돌 떠는 아이를 엄마는 치마폭에 감싸 안고 아궁이 앞에 앉혔다. “아부지 오면 상장 보여줘라.” 말없이 나뭇가지를 꺾어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는 엄마의 얼굴이 잠깐 행복해 보였다. 그 뒤로도 한동안 어떤 비밀스런 의식 같은 팥죽이야기는 엄마와 아이만 아는 체로 계속되었다.

동지가 다가올 무렵이면 깡촌 아이들의 얼굴에 허옇게 마른버짐이 피었다. 지난 가을. 들녘의 알곡 한 톨, 텃밭의 푸성귀 한 잎조차 알뜰히 챙겨 고방에 들여놓았지만 밥상은 점점 빈약해져 갔다. 쌀 구경하기가 힘들어졌고 보리와 콩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소작농들의 형편이 다 그렇듯, 고방엔 이미 거미줄이 쳐지고 배고픈 생쥐들의 설레발도 밤새 이어졌다. 덩달아 겨울을 나기위한 가장들의 근심도 늘어나는 시기가 이때쯤이었다. 그러나 설 다음으로 가는 작은설이 동지가 아니던가. 부흥을 뜻하고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던 동지였기에 너나 할 것 없이 팥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동짓날이면 깡촌의 부엌에도 팥 삶는 냄새가 났다. 팥을 고아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행여라도 팥죽을 먹지 않으면 사람들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는 속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힘들게 사는 이들이기에 더 나은 내년을 기원하는 간절함이었을까. 애기 동지가 아닌 해에는 모두가 팥죽을 쑤었다.

어머니는 전날 불려놓은 팥을 무쇠 솥에 넣고 한소끔 끓여 떪은 맛을 우려낸 뒤 물은 버렸다. 구수한 팥죽을 만드는 기본인 셈이다. 품질 좋은 팥도 한 몫 했다. 지난 가을, 멍석에서 말린 것들 중 알이 가장 실한 놈들만 골라 챙겨 놨던 것이다. 팥죽의 맛을 좌우하는 건 삶기다. 무르게 잘 삶아내는 게 관건이었다. 어머니는 잔가지로 아궁이의 불을 조절 해가며 오랜 시간 정성들여 삶아냈다.

흐물흐물 잘 삶아진 팥을 주물러 채에 앙금을 내려주면 준비는 대충 끝이 난다. 그렇게 곱게 걸러낸 팥물은 잠깐 앙금과 윗물을 불리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온기가 남아있는 무쇠 솥에 불려 놓았던 찹쌀과 윗물을 따라 붓고 끓이면 본격적인 죽 끓이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동지 때만 등장하는 긴 나무주걱으로 어머니는 쌀이 퍼질 때 까지 저어가며 끓이다, 가라앉은 팥 앙금을 서너 번 나누어 섞어 넣은 뒤 다시 끓였다. 이제부터는 나무주걱이 바빠진다. 부뚜막에 올라앉아 키만한 나무주걱을 들고 오빠들은 서로 젓지 않으려 싸움박질 하곤 했다.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어머니는 바쁘게 우리들이 몽글몽글 뭉쳐 만들어 논 새알심을 날라 솥으로 던져 넣었다. 마침내 새알심이 떠오르고 팥죽색이 짙어져 걸쭉해지면 소금으로 간을 했다. 팥죽은 완성되었다. 장독에도 한 그릇, 헛간에도 한 그릇, 방마다 팥죽을 들여놓은 뒤 이웃에게도 나누었다. 구멍 뚫린 내복을 입고 팥죽 배달 가던 오빠들이 참으로 우습기도 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팥죽을 먹고, 나이도 먹고 자랐다.

내게 팥죽은 가난의 기억이다. 온몸으로 기억하는 어머니의 죽이다. 어쩌다 받은 어린 딸의 우등상 선물로 내놓았던 어머니의 팥죽 한 그릇. 어찌 그 맛을 잊을 수 있을까. 먹을 것이 궁했던 그 시절의 겨울별미 여서가 아니다. 줄 것이 없었던 어머니의 애닮은 마음 이어서다.

곧 동지가 다가온다. 팥죽을 끓여야겠다. 얼려서 먹어도 보리라. 장독대 한쪽에서 살얼음 언 팥죽을 먹으며 어머니를 향하던 그 때, 그 아이의 마음도 다시 꺼내 보리라.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 그런 팥죽 한 그릇 끓여 먹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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