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바다 쪽으로 길게 방파제가 누워 있다. 속박에서 벗어나 더 넓은 바다로 내 달리고픈 방파제를 잡아 세운 건 높은 전망대였다. 그 전망대에 올라앉아 개미처럼 움직이는 배들을 바라본다. 둥근 실내는 마치 시간이 흐르는 자취같이 물결 흐르듯, 파도치듯,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멀리 있는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일까. 얼기설기 삼발이를 쌓아 놓은 곳에 작고 빨간 등대 하나가 눈에 띈다. 외롭지 않으려는 듯. 항구로 들고나는 배를 위로(慰勞)하고 다독이기 위해 또 다른 방파제 위의 하얀 등대와 외로운 지킴이 역할에 충실 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등대 같은 많은 이들이 있다. 늦게 들어오는 자식을 걱정해 문가를 서성이는 부모도 등대고, 아프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토닥이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도 등대다. 때론 한 사람이 어디선가 나의 등대가 되어 걱정하고 사랑해준다면 나도 사랑을 주는 ‘한 사람’이나 사랑을 받는 다른 누군가’ 가 되고 싶어진다. 그래서 서로 서로 비추며 살아가기에 험한 세상 안개도 무섭지 않고 암초도 두렵지 않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미 누군가의 등대인지도 모른다.
지평선을 향해 앉았던 자리가 서서히 돌아 마침내 항구로 돌아왔다. 잠깐이나마 자유로운 유영을 끝내고 시야는 한 시간도 못되어 도심의 울창한 아파트 숲으로 돌아와 갇혔다. 바다로 향하고픈 방파제의 속울음을 대신 안고 이탈한 잠깐의 외출. 그 시간은 먼지처럼 가뭇없이 휩쓸려가는 삶의 덧없음이어라. 그래서 헤어지기 싫어 다시 만나기도 두려운 소중한 인연 같은 무상함. 기억 저편의 바다는 내게 그런 곳이다.

어부의 딸은 터벅머리 총각선생님을 사랑했다. 바닷가 야트막한 언덕 위의 작은 초등학교에 갓 부임한 총각선생님도 긴 머리 여대생에 빠져버렸다. 노을 지는 황금빛 모래사장에 하얀 프릴 원피스와 터벅머리가 함께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깃발을 휘날리며 뭍으로 들어오는 고깃배의 만선을 자축하는 자리에도 그들은 함께였다. 학교 담장을 덮은 백 만송이 줄장미가 그들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해 경쟁하듯 화르르 피어났다. 파도는 속삭이는 그들의 밀어를 엿 듣기위해 숨죽이며 찰랑거렸다. 그들이 펼치는 한 편의 드라마는 로맨틱했고 세상은 오직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그때 그 황홀했던 선홍빛 바다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모가 지체 없이 달려가 딸을 데려 온 것은 결핵 때문이었다. 이모네의 고기잡이배가 만선으로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오는 날이 잦아지자 깡 촌 어부의 딸은 일찍이 도시로 유학 갔다. 순전히 고깃배 덕이었다. 그 딸이 대학을 다니다 결핵이라는 병에 걸린 것이었다. 각혈을 하며 핏기 없는 얼굴로 긴 머리를 날리며 바닷가를 헤매는 사촌언니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듯 보였다. 그런 힘겨운 투쟁을 하던 언니에게 사랑이 찾아 온 것이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캔버스를 등졌던 언니를 다시 그 앞에 앉혔고 물기 가득한 몽환적인 그림들을 쏟아내게 했다. 마침내 이모는 만선의 고기잡이배가 싣고 온 물고기를 죄다 잔칫상에 올리고 터벅머리 총각을 사위로 맞았다. 그리고 이듬해 그들은 손잡고 바닷가 둥지를 떠났다.

그 후, 언니의 아름답게 찰랑이던 검고 긴 머리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조금씩 잊혀져갈 무렵. 예전의 그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다시 바닷가 친정에 나타났다. 함께 손잡고 떠났던 터벅머리는 없었다. 상처를 했다는 둥, 소박을 맞았다는 둥 소문만 무성할 뿐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 해 주는 이는 없었다.
보슬비 오는 바닷가를 신음 같은 괴성을 지르며 맨발로 내 달리던 언니를 여러 번 보고 말았다. 그들이 밀어를 나누던 모래사장에 성난 파도처럼 달리다 쓰러져 업혀오기도 했다. 그때 그 바다는 통금의 바다, 몸살 앓는 격랑의 바다였다. 그러나 쓰나미처럼 밀려와 아픔을 토해내던 태풍도 지나가기 마련. 마침내 바다는 다시 모래를 품고, 뭍을 품고 잠잠해졌다. 사랑도 이별도 그런 것이었다.

전망대는 돌고 나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한때는 그 사랑으로 인해 행복했고 이별의 통증 앞에서 절망했던 누군가의 바닷가 추억도 파도에 실려가버렸다. 노래하는 파도마저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춰지던 그때. 그 바닷가 모래사장은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누구나 왔으면 가야할 때도 있듯 오늘 내가 바라 본 저 바다도 세월이 흐르면 변해 있을 것이다. 무상한 삶의 이치다. 바다를 보면 욕심내면서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저녁의 항구로 어스름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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